과학과 정치, 윤리와 책임 등의 갈등을 겪은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과 업적을 알아보는 글입니다. 올해(2023년 8월15일) 개봉예정인 크리스토퍼 놀런감독의 다음 영화‘오펜하이머’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원자폭탄의 아버지에서 매카시즘의 희생자까지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정치, 윤리와 책임, 명예와 추락 등 다양한 모순과 갈등을 겪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업적은 '인셉션'과 '테넷'의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감독의 다음 작품으로 올해 8월 개봉예정인 '오펜하이머'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어떤 인물인가?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에서 부유한 유태계 사업가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내성적이고 천재적인 면을 보인 아이로서 인문학과 과학에 모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 진학하여 화학을 전공했으나, 물리학에 깊이 빠져 들어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당시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등 새로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분야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론물리학계에서 주목받는 연구자로 활약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과 버클리분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론물리학분야에서 다양한 주제를 연구했으며, 우주선현상, 중간자론, 중양자반응 등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천체물리와 일반상대론에도 관심을 가지고 중성자성과 별의 중력붕괴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젊은 물리학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자신의 연구실을 세계최고 수준의 이론물리학연구소로 만들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원래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나, 1930년대에 들어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것을 계기로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대공황에 따른 당시 피폐한 삶의 풍경도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파시즘을 반대하는 다양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를 맺었고, 교수노조를 만들어 독일에서 쫓겨난 유태계 과학자들이나 스페인공화파를 돕는 기부금을 조성하는 등 직접적인 실천에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적 성향보다도 앞서는 애국주의적 인식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이유와 과정
오펜하이머는 1941년부터 미국정부의 원자폭탄 개발프로젝트인 '맨해튼프로젝트'에 참여하여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로스앨러모스 비밀연구소 소장으로서 원자폭탄개발을 주도했습니다. 그는"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게 시급하다"라고 말했으며, 이것은 그때 참여한 과학자들에게도 보편적인 인식이었습니다.

1945년 7월 16일, 성공적으로 세계최초의 원자폭탄시험인 '트리니티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 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이유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적 성향보다도 앞서는 애국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치 독일과 일본의 패전을 위해 미국 정부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원자력 에너지가 인류에게 큰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원자력 에너지를 화력 발전소나 의료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원자 폭탄 개발에 대한 동기는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과 도전욕이었습니다. 그는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 등 최신 물리학 이론을 적용하여 원자 폭탄 개발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41년부터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 폭탄의 설계와 제작에 관여했습니다.
개발 과정
그리고 그는 다른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원자 분열과 연쇄 반응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1943년부터 로스 앨러모스 비밀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원자 폭탄 개발을 총괄했습니다. 그는 수천 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지휘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원자 폭탄 개발에 필요한 장비와 자원을 확보하고, 안전과 보안을 유지하고, 정부와의 협조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45년 7월 16일 성공적으로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 시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수행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는 시험장에서 원자 폭탄의 폭발을 지켜보았으며, 시험 결과를 정부에 보고 했습니다. 그는 시험 후 "나는 죽음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과학적 성공은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에 대해 깊은 후회와 죄책감을 느꼈으며, "나는 죽음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핵무기의 국제통제를 주장한 이유와 과정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개발에 성공한 후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다"며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 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원자폭탄투하 후 핵무기의 위험성과 핵전쟁 가능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으며 수소폭탄개발에도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는 닐스보어가 제안한 '열린 세계'라는 개념으로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통제를 주장했습니다. 즉, 각 나라들은 원자력에너지에 대해 주권을 포기하고, 비밀 없이 모든 내용을 공유하는 국제적 통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정부와 대립하는 입장이었으며, 점차 매카시즘의 희생양으로 몰려갔습니다.
핵무기 국제통제를 주장한 이유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였지만, 핵무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핵무기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하고 위험한 무기라고 인식했으며, 과학의 오용으로 인해 탄생한 무기라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그는 핵무기가 국제 정치와 외교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는 핵무기가 전쟁의 균형을 깨트리고, 민간인들에게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가져오며, 환경과 생태계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핵무기가 강대국들의 강권과 독점으로 이어지고, 약소국들의 자주성과 안전성을 침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핵무기가 국제 갈등과 긴장을 악화시킬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핵무기 통제 주장 과정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핵무기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무기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는 1945년부터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닐스 보어가 제안한 ‘열린 세계’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를 주장하였으며, 유엔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 발언하여 미국 정부가 소유한 모든 핵무기와 재료를 유엔에 넘겨주어야 하며, 모든 나라들이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주권을 포기하고 비밀 없이 모든 내용을 공유하는 국제적 통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소련이 첫 수소 폭탄 시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수소 폭탄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너무 강력한 무기라고 말하며, 미국 정부가 수소 폭탄 개발을 중단하고 소련과 협상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미국 정부에게 듣는 귀가 없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1950년부터 매카시즘의 희생양으로 몰려갔습니다.
매카시즘은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정적이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하려는 경향이나 태도를 의미합니다. 매카시즘은 오펜하이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고, 그가 원자력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 청문회를 받았으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들이 허접하거나 위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결국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관련 기밀 정보 접근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오펜하이머 삶과 업적에 대한 평가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개발에 성공한 후 모든 핵무기의 국제통제를 주장하다가 매카시즘으로 몰려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업적과 명예를 잃었습니다.
그는 학계로 돌아갔으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과학자들과도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1967년 2월 18일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향년 62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후대 평가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서 과학적 업적을 남겼지만, 핵무기 국제 통제를 주장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했습니다. 그는 과학과 정치, 윤리와 책임, 명예와 추락 등 다양한 모순과 갈등을 겪은 인물로서, 인간의 복잡성과 애매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 등 최신 물리학 이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창의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고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천체 물리와 일반 상대론에도 관심을 가지고 중성자성과 별의 중력 붕괴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학적 성공은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수천 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지휘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성공적으로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 시험인 '트리니티 실험’과 일본에 대한 원자 폭탄 투하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핵무기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무기라고 인식했으며, 과학의 오용으로 인해 탄생한 무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45년부터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닐스 보어가 제안한 ‘열린 세계’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를 주장하였으며, 유엔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 발언하여 미국 정부가 소유한 모든 핵무기와 재료를 유엔에 넘겨주어야 하며, 모든 나라들이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주권을 포기하고 비밀 없이 모든 내용을 공유하는 국제적 통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 예상
크리스토퍼 놀란감독은 복잡한 내러티브와 심미적인 시각효과로 유명합니다. 그는'인셉션', '인터스텔라', '다크나이트'등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작품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오펜하이머'에서도 오펜하이머의 삶과 업적을 다양한 관점과 시간선으로 재구성하고, 원자폭탄의 폭발과 같은 장면에서는 화려하고 강렬한 시각효과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크리스토퍼 놀란감독은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왔습니다. '메멘토', '덩케르크', '테넷' 등에서 인간의 기억과 역사, 운명과 선택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에서도 오펜하이머가 과학자로서 어떤 책임과 윤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가 원자폭탄개발에 참여하고 핵무기 국제통제를 주장한 것이 옳았는지, 그가 자신의 신념과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룰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2023년 8월 15일에 개봉할 예정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에 종종 얼굴을 비친 실리안 머피가 오펜하이머 역을 맡았고, 에밀리 블러트가 캐서린 키티 오펜하이머 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라미 말렉, 조시 하트넷 등이 유명 배우들이 영화의 다른 주요 인물들을 연기합니다.
이번 2023년 8월 15일에 개봉하는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오펜하이머의 삶과 업적을 다룬 작품입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정치, 윤리와 책임, 명예와 추락 등 다양한 모순과 갈등을 겪은 인물로서, 인간의 복잡성과 애매함을 보여줍니다.
크리스토퍼 놀란감독은 이전 작품인 '인셉션'이나 '덩케르트', '다크나이트'에서 보여주였던 복잡한 내러티브와 심미적인 시작효과, 그리고 인간의 기억과 운명, 선택을 탁월하게 그리는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삶이 복잡다단한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어떻게 그릴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사진 출처 : 오펜하이머 공식예고편(https://youtu.be/oSqK_v6zP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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