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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 삼부회 소집

%@#$@ 2022. 5. 29.

프랑스 대혁명은 시민이 중심이 된 세계 최초 혁명이다. 대표적인 시민혁명의 전형인 프랑스 대혁명은 왕, 성직자, 귀족 중심의 봉건사회를 타파하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혁명이다. 18세기 후반(1780년대)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배경과 과정 특히 구제도 모순을 타파하기 시작한 삼부회 소집에 대해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삼부회 소집

프랑스 대혁명 삼부회 소집

목차

    1780년대(18세기 후반) 프랑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상황은 루이 14세 이후부터 오랜 기간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1780년대 프랑스 왕은 루이 16세, 왕비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 16세는 1775년 미국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독립전쟁에서 전통적 숙적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지원했다. 루이 16세의 미국 지원으로 왕실은 재정상태가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루이 16세는 극심한 재정난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자금, 즉 세금을 걷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금은 대부분 3 신분계층이 부담해야만 했다.

     

    프랑스 신분계층은 3 계층으로 신분이 나누어진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①제1 신분 : 국왕과 성직자
    ②제2 신분 : 귀족
    ③제3 신분 : 나머지 프랑스인. 대다수 농민. 부르주아도 제3 신분에 포함.

     

     

    <부르주아>
    이들은 은행가, 금융업자, 도매상인, 의사, 법조인, 기업가 등 자유로운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18세기는 금융과 상업의 발달로 부르주아들(신흥 부자, 중산계급 시민)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었다.

    이들 부르주아는 부자인 만큼 교양 즉, 새로운 사상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당시 프랑스를 지탱하고 있는 핵심계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농민과 별로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제 3 신분(프랑스인 98%) 특히 부르주아들은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포함된 부르주아들은 그 당시 유행하던 계몽주의와 자유 자본주의 사상으로 점차 의식이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봉건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면세 특권이 있는 왕실과 귀족에게 세금을 징수하고자 했지만, 결국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재무장관 칼론 : 국민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 하지만 특권계층인 성직자와 귀족의 반발로 칼론 실각함.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 : 성직자, 귀족, 평민 모두 한자리에 모여하는 회의 삼부회를 175년 만에 개최.

     

     

    프랑스 대혁명 - 입법의회와 국민공회

    프랑스 대혁명은 삼부회 소집 이후 왕과 성직자, 귀족의 횡포에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국민대표기관인 의회를 설립해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인권선언에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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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부회 소집(1789. 5. 5)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여러 개혁안이 실패하자, 루이 16세는 모든 신분 제1, 2, 3 신분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삼부회는 루이 14세 때 만들어졌지만, 1614년 이후  대략 175년 만인 1789년에 개최됨.

     

    1 신분과 2 신분은 300명, 3 신분은 600명으로 구성된 회의였다. 그리고 3 신분은 대다수 봉건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부르주아들이었다. 하지만 삼부회는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표결방식에 의견 차이를 보였고, 귀족들이 회의실 문을 잠가버리는 평민 대표를 무시하는 행동을 한다.

     

    표결방식 : 1,2 신분은 신분별 투표( 세신분 중 2 신분만 동의하면 통과)를 주장했고, 3 신분은 다수결을 주장했다.

     

    결국, 제3 신분 대표들은 베르사유 궁전 근처 인근 테니스장에서 스스로 국민대표기관임을 선언하고 국민의회를 결성한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국민의회 인권선언 발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테니스코트 서약. 1789.6).

     

    하지만 루이 16세가 군대를 모아 이들 국민의회를 해산시키려 하자, 이에 분노한 파리 민중은 분노에 휩싸여 봉기를 일으킨다. 성난 민중들은 전제정치의 상징이자 그들이 증오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1789.7.14)
    바스티유 감옥은 원래 파리 동부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요새였지만, 루이 13세부터 감옥으로 사용처가 바뀌었다. 그리고 루이 14세 때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 디드로 등을 수감시키면서 구체제 즉,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중 봉기가 시작되자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프랑스 시민들은 위대한 혁명의 시작이 생각했고, 7월 14일을 프랑스혁명기념일이라 부르며 국경일이 됐다.

    바스티유 감옥이 붕괴된 후 이곳에서 나온 잔해로 콩코르드 다리를 건설했다. 앙시앙 레짐(구제도) 상징을 밟고 다니자는 의도로 지어진 다리다.

     

    다리
    콩코르드 다리

     

    혁명의 불길은 프랑스 전역으로 번졌고, 영주나 귀족 그리고 수도원 등을 습격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과격한 시민들 특히 농민들의 반란은 부르주아가 주도한 혁명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은 국민의회에서 혁명의 지지기반인 농민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1789년 8월 26일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발표한 인권선언문에는 노예신분 폐지, 특혜 폐지, 평등사회 실현이 담겨 담겨 있다.

     

    국민의회는 모든 프랑스인들은 조세와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권 선언을 발표했다.

     

     

     

    프랑스 대혁명 - 자코뱅과 공포정치

    프랑스 의회의 정치가였던 마라와 조르주 당통이 중심이 된 자코뱅당(급진파)은 점차 상퀼로트의 지지를 기반으로 득세하기 시작했다. 자코뱅당은 온건파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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