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랑스 대혁명 - 입법의회와 국민공회

%@#$@ 2022. 5. 30.

프랑스 대혁명은 삼부회 소집 이후 왕과 성직자, 귀족의 횡포에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국민대표기관인 의회를 설립해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인권선언에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며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혁명 이후 프랑스 시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후 어떤 과정을 통해 입법의회와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는지 소개하겠습니다.

 

 

프랑스-대혁명
입법의회와 국민공회

프랑스 대혁명 - 입법의회와 국민공회

 

목차

     

    혁명 이후 재정난

    혁명 이후 프랑스 시민의 생활은 개선되지 않았고, 이에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수천 명의 부녀자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했다. 이 행진으로 루이 16세는 튈르리 궁전에서 시민감시를 받게 되었고, 국민의회도 파리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점차 귀족과 성직자들 일부가 해외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혁명 봉기는  라파예트 등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프랑스 시민(농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은 이유>
    인권선언의 평등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혜를 입는 계층이 자본이 있는 자들, 즉 부르주아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헌법에선 시민을 능동적 시민(3일간 임금노동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할 수 있는 자)과 수동적 시민으로 구분하고 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투표권)은 능동적 시민에게만 부여되었다. 농민(프롤레타리아)에겐 발언권 같은 정치참여권은 부여되지 않았다. 그 결과 새로운 유산계급의 등장을 알린 것이다.

    봉건제 폐지 : 영주에게 납부하던 세금, 즉 불합리한 세금 청산을 원하는 농민(프롤레타리아)은 현재 납부하던 공납의 스무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일시불로 지불해야 했기에, 사실상 불합리한 착취 제도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바렌 사건(1791.6)

    튈르리 궁에 있던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국경 근처 바렌에선 민중에게 발각되었고 다시 파리로 압송되었다. 프랑스 시민들은 이런 루이 16세의 행태에 놀라면서도 분노하고, 의회는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다(얼마 후 다시 복구).

     

     

    입법의회( 1791.10 - 1792. 9)

    새로운 헌법 제정을 구성되었던 입법의회(1791.9)는 제한 선거를 통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어 새로운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입헌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한 온건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바렌 사건을 계기로 강경파(군주제 폐지 주장, 공화국 지지)의 기세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혁명 사상 전파를 두려워하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대(對) 프랑스 동명을 맺어 프랑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입법의회는 이들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는데, 이를 '혁명전쟁'이라 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며 국경마저 뚫리게 되었다. 이유는 전쟁 직후 프랑스 장교 대다수의 망명과 나태한 병사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내는 전쟁으로 인해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으로 프랑스 상황은 점차 안 좋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 도시에 상퀼로트가 등장했다.

    상퀼로트 : 반바지(퀼로트) 대신 긴바지를 입었고, 붉은 모자와 긴 창을 들고 다니며 시위를 하며 공포정치를 조장함.

    이들 대부분은 수동적 시민이었다. 평등과 공화제를 요구하며 급진적인 과격한 시위를 하던 이들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급진적 민중을 상퀼로트라 불렀다.

     

    그리고 대 프랑스 연합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전 지역에 격문이 발송하며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이에 적군에게 함락당하기 직전이라는 소식에 전국에서 파리에 수많은 시민이 모집되었고, 이렇게 모인 의용군들이 튈르리 궁전으로 행진하며 부른 노래 '라 마르세예즈'는 현재 프랑스 국가로 이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의용군들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 총사령관이 루이 16세 권리를 되찾게 해 주겠다는 선언에 더욱 분노했다. 이 말은 결국 프랑스를 다시 이전 절대왕정으로 되돌려놓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파리 시민들은 분노해 과격한 시위로 파리를 장악하고, 튈르리를 습격했다. 의회는 결국 과격한 시위에 밀려 루이 16을 유폐시키고, 그의 왕권을 정지시켰다. 사실상 군주제가 몰락한 것이다.

     

     

    국민공회( 1972. 9 - 1795. 10)

    이후 이어진 연합군과 전투(발미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은 국경을 넘어 벨기에를 점령하여 강제 병합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 참가한 의용군 중 대다수는 상퀼로트였는데, 이들 상퀼로트는 급진적 자코뱅파를 지지했다.

     

    자코뱅파는 소시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를 받으며 점점 더 세력을 키워갔다. 국민공회는 지롱드파(온건파)와 자코뱅파로 이루어졌는데, 발미전투 이후 공화정 토대를 마련한 이들은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려 최고 가격제를 실시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국민공회의 지롱드파와 자코뱅당은 루이 16세의 처우에 대해 서로 의견 대립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첨예한 대립(투표) 끝에 근소한 표 차이로 루이 16세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1793.1)은 근처 유럽 군주국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들 국가들(영국, 스페인 등) 11개국은 프랑스를 적대시하며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근처 유럽 국가들의 공공의 적이 된 프랑스는 또다시 전쟁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 삼부회 소집

    프랑스 대혁명은 시민이 중심이 된 세계 최초 혁명이다. 대표적인 시민혁명의 전형인 프랑스 대혁명은 왕, 성직자, 귀족 중심의 봉건사회를 타파하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

    write-keyboard.tistory.com

     

     

    프랑스 대혁명 - 자코뱅과 공포정치

    프랑스 의회의 정치가였던 마라와 조르주 당통이 중심이 된 자코뱅당(급진파)은 점차 상퀼로트의 지지를 기반으로 득세하기 시작했다. 자코뱅당은 온건파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공

    write-keyboard.tistory.com

     

     

    영국 유럽연합 탈퇴 브렉시트 이유

    영국이 지난 2020년 1월 31일에 유럽연합(EU)을 47년 만에 탈퇴를 했다. 유럽의 3대 강국 중 하나인 영국이 왜 유럽연합을 탈퇴했을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브렉시트라 하는데, 영국이 브렉시트

    write-keyboard.tistory.com

     

     

    개는 어떻게 인간과 함께 살게 되었을까?

    개는 인간에게 이로운 동물이다. 사냥, 구조활동, 폭발물 또는 위험물 탐지, 경찰견, 맹인견 그리고 우리 친구 등 많은 분야에서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로운 동물인 개

    write-keyboard.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