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 자코뱅과 공포정치
프랑스 의회의 정치가였던 마라와 조르주 당통이 중심이 된 자코뱅당(급진파)은 점차 상퀼로트의 지지를 기반으로 득세하기 시작했다. 자코뱅당은 온건파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공회에서 루이 16세의 처형(1793.1)을 시키며 절대왕권의 종말을 알립니다. 혁명으로 불타오르는 프랑스를 바라보던 주변국의 선전포고 이후 프랑스는 국내 정세와 국외 정세는 어찌 되었는지 소개하겠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 자코뱅 공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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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자코뱅
프랑스혁명은 제3신분 부르주아가 주도한 시민혁명이다. 부르주아들은 테니스코트 선언으로 국민의회를 선포해 헌법을 기반으로 입법의회를 선포했다. 그리고 온건파와 급진파간의 대립(국민공회)을 거쳐 주권이 시민에게 있는 공화정을 선포했다(프랑스 1 공화국, 1792.9.22).
공화국의 탄생으로 절대왕권의 상징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 16세 처형으로 왕정의 종말을 알린 것이다. 이로써 군주제는 무너진 것이다.
1. 공화국은 지롱드 파(온건파)와 자코뱅파(급진파)가 정국을 주도했지만, 지롱드 파의 무능함에 화가 난 파리 민중의 습격을 당했다. 이를 기회로 삼은 자코뱅 파는 지롱드 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차지했다.
<지롱드 파와 자코뱅파>
이들은 제3 신분에 속하는 자들로써, 작가, 법률가, 은행가, 사업가등으로 부르조아들이다. 부르조아들은 제 3신분 대표로서 삼부회에 참가함으로써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프랑스혁명을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민중의 권리와 주권을 위해 혁명을 하기보단 왕의 권한을 축소하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등 낡은 제도 개혁을 통해 자유자본주의를 추구했다.
지롱드 파와 산악파(몽테뉴 파)는 둘 다 자코뱅(여러 정파 평원파, 네오 자코뱅 등으로 구성된 빅 텐트 클럽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롱드 파가 이 클럽에서 탈퇴하면서 자연스레 자코뱅을 산악파(몽테뉴)가 이끌게 되었다. 그래서 산악파를 자코뱅으로 부르기도 한다.
①지롱드 파(온건파) : 초기 입법의회를 주도하던 정파로서 부르주아를 지지. 라파예트가 중심이었다.
②자코뱅(산악파, 급진파) : 소시민과 프롤레타리아 지지. 장 폴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었다.
프랑스 의회에서 지롱드는 오른쪽(우), 자코뱅은 왼쪽(좌)에 앉아서, 우파와 좌파는 이들이 않은 방향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자코뱅을 이끌었던 장 폴 마라가 코르데에게 암살당한 후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가 주도했다.
소시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를 받는 자코뱅은 1793년 헌법에서 모든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전에는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구분되어 능동적 시민에게만 정치참여권이 인정되었다.
자코뱅은 지지기반인 하층민을 의식한 듯 이외에도 노동권과 생존권 그리고 실업자와 노약자에게 지원을 규정하는 복지정책을 규정하는 등 그 당시로서 파격적인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 헌법을 시행하기엔 국내와 국외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국내는 지롱드 파의 반란과 민란으로 혼란스러웠고, 물가폭등과 식량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리고 국경에선 여전히 대 프랑스 연합군과의 전쟁이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자코뱅이 이끄는 국민공회는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고 가격제를 실시하고,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를 통해 소위 '혁명의 적'이라며 반대파를 제거해 나갔다.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1798.6 - 1794.7)
자코뱅은 반혁명 세력 타도를 한다는 명목 아래 제정한 헌법 대신 혁명정부를 선언했다. 이들은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를 통해 민중을 감시, 탄압하였고, 반대파 지롱드를 숙청해 나갔다.
자코뱅은 민심안정과 혼란 수습이라는 명분 아래 정적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수많은 귀족과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도 처형(1793.10.16)당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온갖 추문에 휩싸여 루이 16세처럼 단두대로 향했다.
이러한 공포정치를 주도한 자는 로베스피에르인데, 그는 루소의 계몽주의 영향을 받아 민중을 계몽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를 위해 잔인하고 가차 없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같은 동지라도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숙청했다.
<당통>
산악파 핵심인물로서, 그 역시 국내 안정을 위해 다소 과격한 공포정치 시행에 동조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혁명이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돼 있다고 생각한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당통은 단두대의 이슬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자코뱅이 정권을 차지하게 해 준 즉,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소시민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신뢰(믿음)가 돌아서게 했다.
자코뱅을 지지했던 이들은 주로 하층민들(상퀼로트)이었는데, 이들은 국가를 위해 의용군을 자처해 적 연합군과 싸웠다. 그리고 시위와 폭동으로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계층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최고 존재'에 대한 예배를 기획했다. 하지만 최고 존재는 바로 로베스피에르 자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권력의 달콤함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의 가혹한 공포정치 반감을 품은 반(反) 로베스피에르 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력 열월(熱月) 즉,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1794.7.22)으로 처형당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냈던 그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됐다.
<단두대(기요틴, guillotine) 유래>
단두대는 프랑스혁명 당시 만들어진 사형 도구다. 이 단두대를 통해 왕, 귀족, 성직자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한데 이 사형도구 기요틴은 인권과 평등을 위해 프랑스혁명 당시 사용되었다. 혁명 이전 프랑스에서는 죽음 역시 차별을 두었다.
성직자나 귀족은 고통 없이 단칼에 처형을 했지만, 제3계급(빈곤층, 하층민)은 최대한 고통을 주기 위해 화형 같은 고통스러운 사형법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혁명이 시작되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인권선언이 발표 후 죽음 역시도 평등하게 맞이해야 한다는 기요탱(Guillotin) 박사의 주장으로 도입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에서 기요틴이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로베스피에르 사형 이후 자코뱅은 밀려나고 다시 온건파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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